실미도 부대’ 창설·훈련 소대장 충격 증언
“이탈 훈련병 6명 즉결 처형”
“직접 겪지 않은 사람은 당시 실미도에서 벌어진 상황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훈련병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북한으로) 넘어가지 않으면 죽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기간병들도 그들과 똑같이 함께 꽁보리밥 먹고, 같은 침대에서 자고, 혹독한 훈련을 겪으며 함께 울었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목표를 함께 갖고 있었습니다. 김일성을 죽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외 다른 것을 생각할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배신을 꾀하거나 탈출을 시도하는 자를 용서할 순 없었습니다. 그런 자들을 남겨둔다면 임무를 완수할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모두…, 죽였습니다.”
처음 모습 드러내는 핵심 인물
언론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실미도 부대(1968년 4월 창설됐다 해서 ‘684부대’라 불리기도 함) 소대장 김이태(金利泰·60)씨는 충격적인 내용을 증언했다. 김씨는 1968년 4월 부대 창설과 함께 실미도로 부임, 훈련 전과정을 지휘하며 주요 순간마다 중요한 결정을 내렸던 사건의 핵심인물이다. 그는 3개월 뒤 부임한 동기 김방일씨와 함께 3개 소대(1개 소대=10명)로 구성된 실미도 부대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사람. 실미도에서 근무했던 기간병들은 “당시 상황을 가장 잘 아는 인물”로 그를 꼽고 있다. 또 다른 소대장 김방일씨 역시 “사고가 났던 1971년 8월 23일을 포함, 주요 사건이 터졌을 때마다 나는 공교롭게 자리에 있지 않았다”며 “주요 순간에 현장을 지휘했던 사람은 김이태씨였다”고 말했다.
▲ 1968년4월 실미도 부대 창설과 함께 부임해 훈련을 지휘했던 소대장 김이태씨.
김이태씨는 증언 도중 여러 번 머뭇거렸다. 군데군데 말을 멈추고 한숨을 쉬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언젠가는 밝혀져야 할 일 아니겠느냐”며 힘들게 말을 이어갔다. 지나간 악몽을 떨치지 못해 괴로워 하는 빛이 역력했다.
“31명의 대원 중 훈련과정에서 숨진 사람은 모두 7명입니다. 한 명은 물에 빠져 익사했고, 나머지 6명은… 처형됐습니다. 처음 처형된 사람은 2명이었습니다. (잠시 주저) 야간에 독도법 훈련을 할 때였습니다. 정해진 시각까지 집결지에 모여야 했는데, 이들이 돌아오질 않는 것입니다. 찾아봤더니 민가에 침입해 숨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임무는 북한으로 넘어가 김일성의 목을 따오는 것입니다. 그런 행동을 하면, 다른 대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겠습니까? 군인으로서 저는, 그런 행동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처리했습니다.”
김씨의 어투는 전형적인 군인 말투였다. 군생활 상당 기간 동안 특수부대를 훈련시키며 보낸 그의 말투는 대부분 ‘~했습니다’와 ‘~했습니까’형 어미로 종결됐다.
특수훈련 전문가… 실제 계급은 중사
“두 번째로 처형된 녀석들은 3명이었습니다. 인질을 붙잡고 난동을 부렸던 놈들입니다. 그놈들은 영화에 나온 것처럼, 민간인을 강간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인질을 붙잡고 있던 놈들에게 제가 갔습니다. ‘일단 나와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민간인 풀어주고 나와라. 그러면 없던 것으로 해 주겠다’고 설득했습니다. 그런데 주모자가 ‘개소리 마라’며 ‘우린 다 죽기로 했다’고 하는 겁니다. 이것은 배신 행위였습니다. 그놈들한테 기울인 정이 얼만데…, 인간적으로 정을 다 줬었는데…, 우리에게 총부리를 돌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훈련병들이 민간인을 강간한 사실은 영화에도 나온다. 영화엔 훈련병 2명이 초등학교 여교사 한 명을 강간한 것으로 돼 있다. 하지만 실제 상황은 그와 다르다. 3명의 훈련병이 20대 초반의 민간인 처녀 2명을 강간한 후, 학교 안에 있던 사람들을 인질로 붙잡고 난동을 벌였다. 사고를 당한 처녀 2명은 훗날 결혼, 자녀를 낳고 평범히 살아가고 있다.
‘실미도’란 소설을 써 당시 사건을 재조명한 백동호(49)씨는 “이탈한 훈련병 3명이 무의초등학교로 침입했다”며 “여교사가 자리에 없는 것을 알고 거리로 나가 민간인을 붙잡은 것으로 안다”고 했다. 현장을 봤다는 한 사람은 “얼마나 무자비하게 다뤘으면, 교실 안에 피가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고 전했다.
김씨가 말을 이었다.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습니다. 그놈들은 군인입니다. 이건 안되겠다 싶었습니다. 민간인을 강간한 놈들은 처벌돼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냥…, 다 없앴습니다.”
모든 것은 비밀… 가명 사용해 통솔
김씨의 실제 계급은 중사. 공군 정보대였던 ‘2325 전대’에서 특수전 교육과 낙하산 침투 교육을 받은 특수부대원이다. 그의 원래 임무는 적지에 떨어져 포로가 된 아군 조종사를 구출해 오는 것. 실미도 부대가 창설되면서 공군은 공작원을 훈련시킬 적임자를 물색했고, 그 결과 당시 23세의 ‘강인한 군인’ 김 중사(당시 하사)가 선발됐다.
“소대장들은 모두 중사였습니다. 하지만 소위 계급장을 달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런 곳에선 계급 같은 것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북괴 김일성의 목을 따 온다’는 한 가지 임무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모든 것은 비밀이었습니다. 훈련병들에겐 우리가 공군이란 사실도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사생활은 묻지도 않았습니다. 걔들이 무슨 일을 하다 왔는지, 형제관계가 어땠는지 그런 것들은 저희들도 모릅니다. 알 이유도, 필요도 없었습니다. 애들에겐 군번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저희들 이름도 숨겼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김빈’이란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동료 상대로 남색 저질러 처형
증언을 하면서 김씨는 ‘북한’과 ‘북괴’를 섞어 사용했다. 그가 아직도 과거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실미도에 있던 3년 남짓한 기간 동안, 집에 연락하지 못했습니다. 한번은 아버님이 편지를 보내셨는데, 한참 뒤에 받아보니 겉봉에 이렇게 써 있었습니다. ‘누구든 이 편지를 받는 사람은 이 사람(수신인)이 죽었나 살았나, 제발 그 사실만 좀 알려달라’ 이렇게 말입니다. 그러니 훈련병들은 어땠겠습니까?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그땐 지금하고 많이 달랐습니다.”
▲ 실미도 해안 썰물이 들면 무의도와 연결된다. 건너편 보이는 섬이 무의도
김씨의 증언은 세 번째로 처형된 훈련병 이야기로 이어졌다. “계간(鷄姦·남색)이라고 아십니까? 그놈은 화장실 가는 동료들을 상대로 계간을 한 놈입니다. 하도 거칠어서 별명이 오랑캐였었는데…. 불응하면 애들한테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훈련병들 눈치가 이상하기에 제가 물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냐고요. 그런데 애들이 두려워하면서…, 소대장에게도 말을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놈이 작업할 때 기간사병을 딸려 보내, 무슨 일인가 알아보라고 시켰습니다. 그런데 그놈이 기간병을 구타한 것입니다. 그 기간병은 맞아서 기절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또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날…. 없앴습니다.”
김씨는 잠시 말을 멈췄다. “이것은 반역행위입니다. 그놈을 그냥 놔두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놈들 중엔 사회에서 살인까지 저지른 놈도 있습니다. 막다른 골목까지, 끝까지 다 갔던 애들입니다. 그리고 기간병들보다 나이도 많았습니다. ‘김일성 목을 따오는 것’ 오직 그 하나를 위해 훈련받아온 놈들입니다. (한숨) 기간병 중 일부는 특수훈련을 받아 북한에 갔다오기도 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상당수는 기본 훈련만 받았습니다. 그러니 그놈들이 우습게 봤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행위를 소대장이 용납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랬다간 어디서 무슨 사고가 또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이 아프다”는 김씨는 또 다시 말을 멈췄다. 잠시 후 다시 이어진 그의 목소리는 한층 어두워져 있었다. “사람이 인생에서 그런 일을 한번 겪는다는 것은…. (한숨) 바닷가를 혼자 걸으면서, 참…, 많이 울었습니다.”
훈련병의 당시 평균연령은 30세. 제일 나이가 많은 사람은 38세, 가장 나이가 적은 사람은 21세였다고 한다. 이야기는 처형 방식에 대한 것으로 옮겨졌다.
훈련병끼리 때려 죽이기도
“사람을 죽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계간을 저지른 그놈은…, 때렸습니다. 다른 훈련병들이 때리게 했습니다. 스물여섯에서 스물일곱 번 정도 때리니까…. 축 늘어졌습니다. 인질을 잡고 난동 부리던 3명은…, 영화에 나온 것처럼 그런 식으로 했습니다. 관계되는 사람들이 다 모여서… (한숨) 처리했습니다.”
영화에는 난동 부렸던 훈련병을 때려 죽인 것으로 묘사돼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한 사람이 나머지 둘을 칼로 찔러 죽이고 자살을 기도했지만 실패했다. 그는 머리에 총을 맞고 죽었다. 김이태씨는 힘들어했다. 중간중간 말이 끊기기도 했고 한숨을 쉬기도 했다. 증언을 잠시 쉬던 그는 “어쨌든 그것이 사실”이라며 말을 이었다.
“훈련과정엔 목표와 방식만 있었습니다. 그 밖의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모든 기준은 북한 124군부대에 맞춰져 있었습니다. 그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빨라야 했고, 조금이라도 더 강해야 했습니다. 인도주의 같은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오직 124군부대를 능가해야 한다는 생각만 있었습니다. 애들한테 정을 줘서…. 애들도 저를 많이 따랐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착잡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마음에 못이 박혀서…. 얼마 있다가 이놈들이 북으로 떠나면 다시는 볼 수 없겠구나 싶었습니다. 돌아서서 울기도 많이 울었습니다. 정책이 잘못됐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됐습니다. 하지만 정책 입안자들도 나름대로의 입장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변명하고 싶지 않습니다. 누굴 원망하겠습니까?”
몽둥이로 구타… 머리 터지면 꿰매
김씨는 영화와 사실과의 차이점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영화에 나타난 훈련과정은 실제보다 약하게 나왔습니다. 애들에게 특수전 훈련을 모두 다 시켰습니다. 북한에 보낼 계획이었기 때문에 제식훈련도 우리식·북한식 두 가지를 가르쳤습니다. 가다가 발이 틀리거나 하는 놈들은 몽둥이로 때렸습니다. 그런데 때리는 부위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아무데고 마구 내리쳤습니다. 머리가 깨져 피가 흘러내리기도 했고, 그 자리에서 터진 곳을 꿰매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영화 시작 부분에 바닷가를 달리는 장면이 나오던데, 실미도 해안의 돌길은 매우 미끄러워, 달리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넘어져 다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달리기는 많이 시키지 않았습니다.”
김씨의 증언은 계속 됐다. “하지만 줄을 타고 계곡을 건너는 장면, 그것은 사실입니다. 훈련받다가 한 명이 떨어져 죽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것은 제가 직접 겪은 일입니다. 저는 10m 높이 절벽에서 뛰어내린 뒤, 다시 기어올라 올 수 있는 체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훈련병들에게 그렇게 시킨 것입니다. 나보다 더 강해야 한다. 그렇게 만들어 놓겠다. 이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김씨는 기간병과 훈련병들의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동료들과 떠난 사람들에게 누가 된다”며 “그들의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훈련병들에게 ‘체포됐을 때의 행동방식’도 교육시켰다고 했다. “영화에는 고문에 대비해 인두로 살을 지지는 훈련 장면이 나오잖습니까? 그런 것은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북괴군한테 잡히면 자폭하라’고 수없이 교육시켰습니다. 훗날 섬을 탈출한 놈들이 유한양행 앞에서 자폭하지 않았습니까? 그 소식을 듣고 ‘이놈들이 교육을 제대로 받긴 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 어떤 부대라도 격파할 자신 있었다
이탈한 훈련병들을 처형한 것에 대해 김이태씨는 “나중에 생길 수 있는 법적문제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군 형법을 배우긴 했습니다. 하지만 임무가 최우선이었습니다. 나라를 위해서라면…. 큰 일을 위해서라면…. (잠시 주저)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 제겐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김씨는 임무를 강조했다. 자신의 임무는 “최강의 부대를 만드는 것이었다”는 김씨는 훈련병들의 전투력에 대해 망설임없이 ‘최고’라고 평가했다. “이 정도면 됐다 싶었습니다. 세상 어느 곳에 갖다 놔도, 해병대·특공대 아니라 그 어떤 부대가 오더라도 격파할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런 막강한 부대를 그냥 썩힐 수 없었다”며 “이들의 베트남 파병을 상부에 건의했었다”고 말했다. “처음엔 ‘애들을 데리고 북한으로 넘어가 임무를 완수하고 오겠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애들을 베트남으로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부대의 존재는 기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렇다면 애들을 (정식 군인으로) 임관시켜 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한숨)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김이태씨는 “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놈들을 그냥 놔두면 반드시 사고를 칠 것 같았습니다. 3년이 넘도록 본능을 억압하며 살아온 애들입니다. 갈매기건 뭐건 보이는 것은 죄다 쏴 죽이던 상황이었습니다. 저녁 때 사방이 어슴푸레해지면 훈련병 동향 파악도 쉽지 않았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모두 죽여야 한다’고 건의했습니다. 제가 직접 해치우겠다고 보고했습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실미도 사건이 나기 전, 저는 다른 낙하산 부대를 훈련시키기 위해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두 달 뒤 사고가 터졌습니다.”
보안사 준위로 예편한 김씨는 현재 고향에서 이장으로 일하며 농사를 짓고 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이야기를 이었다. “이제 이렇게 저를 찾으셨으니…. 만약 제가 다시 옛날로 돌아간다 해도, 저는 같은 행동을 똑같이 할 수밖에 없습니다. (잠시 머뭇) 변명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임무는 어디까지나 임무였으니까….”
김씨의 목소리가 잠겨들었다. TV엔 비리혐의로 구속된 국회의원들 소식이 줄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실미도 부대는 ‘김일성 목을 따기 위한’ 목적으로 1968년 4월 만들어진 북파부대다. 창설 주역은 김형욱 당시 중정부장과 이철희 제1국장. 훈련병들은 혹독한 훈련을 통해 ‘인간병기’로 키워졌지만, 미·중 데탕트와 남북화해 분위기로 인해 ‘잊혀진 존재’가 되고 말았다. 3년 4개월이 지난 1971년 8월 23일, 이들은 결국 사고를 치기로 결심, 기간병들을 살해한 뒤 배를 타고 인천 송도로 숨어들었다. 이들은 다시 버스를 타고 서울 대방동까지 진입했지만 군·경과 교전끝에 수류탄을 터뜨려 자폭하고 말았다. 중상을 입은 생존자 4명은 훗날 군사재판을 거쳐 총살됐다.
⊙ 현장주민 최초 증언
“실미도 탈주 때 인질 있었다”
“사실은 그때 인질이 하나 있었습니다. 실미도 훈련병들은 마을 어선을 탈취해 섬에서 도망쳤어요. 그 사람들이 섬을 빠져나온 시각(1971년 8월 23일 새벽)은 밀물이 들어와 있을 때였어요. 만조 때엔 파도가 세고 물살이 빨라서, 노 젓는 고기잡이 배로는 헤쳐 나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당시 마을엔 동력선이 한 척밖에 없었습니다. 석영산이라고, 내 친구 배였는데…. 그 친구한테 훈련병들이 ‘우리는 해방군’이라며 ‘배를 내놓으라’고 윽박질렀습니다. 총을 들이대고 마구 호통치며 위협을 해 대니…, 어쩔 도리가 없었죠. 그 사람들이 내 친구를 인질로 붙잡고 동력선을 빼앗아 송도 앞바다로 타고 간 것입니다.”
‘실미도 사건’을 기억하는 많지 않은 민간인 중 한 사람 차진흥(64)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아이고~. 주민들이 무서워서, 죄다 벌벌 떨고 살았었죠. 그땐 뭐 가릴 것도 없고 법도 없었어요. 훈련병은 말할 것도 없고, 기간병들한테도 무서워서…. 옆에 가까이 가지도 못했어요. 마을에는 ‘사형수들 데려다 훈련시킨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고…. 뭐라더라. ‘굶는 훈련을 한다’ 하든가. 섬에 뱀이며 쥐 같은 것들이 하나 남아나지 않았어요. 그러니 겁이 나서…. 그 사람들이 마을을 어슬렁어슬렁 배회하면 다들 고개 숙이고 숨느라 바빴습니다.”
“우리는 해방군… 배 내놔라” 요구
약 200가구의 주민이 살고 있는 인천 용유도 앞바다의 작은 섬 ‘무의도’. “무희가 춤추는 것 같아 보인다”해서 ‘무의(舞衣)’라 이름 지어졌다는 이 섬은, 하루 두 차례 썰물로 물이 빠지고 나면 ‘역사의 상흔’ 실미도와 갯벌로 연결돼 ‘한 몸’을 이룬다.
원혼들이 이방인의 방문을 꺼렸던 탓일까. 실미도로 가는 길은 수월치 않았다. 무인도 ‘실미’를 처음 찾은 날은 지난 1월 6일 오후, 밀물이 몰려드는 시각이었다. 갯벌을 이용해 건너갈 수 있는 시간이 지난 상황이었다. 밀물 때 실미도를 가려면 무의도에서 배를 빌려야 했다.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았다. “파도가 높아 배를 띄울 수 없다”며 선주마다 하나같이 거절하는 것이었다. 주민들도 달가워 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다 지난 옛날 일을 뭐하러들 자꾸 캐내려 하느냐”는 것이었다. 일렁이는 파도도 마찬가지였다. “비극의 현장을 여론의 흥미거리로 삼지 말라”며 호통치는 것 같았다.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36년 전 일’기억하기 꺼려
실미도를 두 번째로 찾은 것은 다음날인 7일 오전. 이번엔 결항이었다. 무의도로 건너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세 시간 가까이를 멍하니 기다려야만 했다. 실미도가 방문을 허락한 시각은 오전 11시30분. 매서운 바람이 사정없이 뺨을 갈겨대고 있었다. 현지는 황량했다. 말 그대로 아무 것도 없었다. 한동안 이 섬을 지켰던 영화세트는 이미 철거된 후였다. 36년 전 ‘그들’이 사용했던 우물과 당시의 ‘아픔’을 상기시켜 주는 탄피 몇 개가 고작이었다. 지금은 무인도가 된 이 섬에도 한때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주민 남기선(68)씨는 “실미도에 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무렵, 한 가구가 있었다는 말이 있다”며 “그 집 아이가 총에 맞아 죽어, 그 가족이 이곳을 떠났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말했다.
무의도 사람들은 ‘36년 전’에 관해 쉽게 입을 열려하지 않았다. “그 사람들 훈련하는 모습을 멀리서 봤다”는 주민 신일남(64)씨는 “무의도 산에서도 구보 같은 것을 했다더라”면서 “영화에 그런 내용 다 나오지 않았느냐”고 말을 끊었다. 부녀회장을 지낸 차숙인(58·여)씨는 “그때 여기서 살긴 했지만 사건에 대해 우린 잘 모른다”며 “굴 따러 실미도에 다가갔다가 쫓겨난 것밖에 없다”고 했다.
“실미도 부대로부터 피해입은 것은 없었느냐”는 질문에도 주민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저었다. 주민 남기선씨는 “그 사람들은 민간인과 접촉하지 않았다”며 “어떤 아주머니들은 김장도 해주고 하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다”고 했다. 무의도 행정소장을 지낸 주민 조규운(68)씨는 “실미도뿐 아니라 인근 성갑도·덕적도·서곶 등에도 북파 특수부대가 있었다”며 “이젠 모두 다 지난 일 아니냐”며 말을 맺었다.
이범진 주간조선 기자(3Dbomb@chosun.com">bomb@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