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문화

1. 체면문화

♥체면문화에 대한 역사적, 문화적 이해  한재희 (천안대 교수)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용어 가운데 하나가 “체면”이라는 단어이다. “회장님 체면에 말이 아니군!” “아버지 체면에 먹칠을 하다니” “남편 체면 좀 세워줘” “체면 차리지 말고 많이 먹어” 등등 특히 인간관계를 나타내는 대화 중에 많이 나타난다. 또한 이와 관련된 속담 역시 많다. 흔하게 “냉수 먹고 이빨 쑤신다” “가난할수록 기와집 짓는다” 등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사회적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인용되는 것들이다.
체면이라는 단어를 문자적 의미대로 풀이하면 “몸의 바깥 면”을 뜻하지만 이는 인간관계나 사회적 상황에서 자기의 내면 또는 자기와 관계된 사실과 다르게 행동함으로서 자신의 지위나 외적인 명분을 높이려는 행동의 과정과 관련된 “사회적 안면”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우리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통용되는 체면이라는 말은 자신의 내면과 행동의 일치성에 있어서의 명예와는 다른 의미로 활용된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 이미 정보화 사회의 틀에서 우리 사회의 구조와 대인관계의 형태가 과거와는 많이 다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행동양식에 깊숙이 배여 좀처럼 변하지 않고 있는 체면은 어떤 연유에서일까? 우리 문화의 관계적 특징 중 하나인 체면은 단순한 행동적 특징이기보다는 역사 속에서 이해되어져야만 하는 요인이다.

한국인의 체면에 대한 문화적 특징은 무엇보다도 전형적인 집단주의 문화와 불확실성 회피문화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집단주의 문화의 특징 중 하나가 자기의 내면에 있는 감정과 생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상대방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를 염두에 두기 때문에 속마음과 표면적 행동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하자면 유교적 가치관과 구조 속에서 형성된 가족주의에 기초한 집단주의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한국인의 가치관과 사회적 관계의 틀을 형성하고 있는 조선시대의 유교는 효의 가르침이 그 특징이다. 따라서 유교의 기본적인 윤리라고 할 수 있는 “오륜(五倫)”도 “부자유친”이라는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로부터 시작하고 있으며 다섯 항목 중 세 항목이 가족관계에 관한 원리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가족주의가 원형이 된 집단에서 개인은 “우리”라는 틀 안에서 생각하는 법을 배우며 명분을 중시하는 형식주의적 사고방식을 갖게 된다. 조선시대 양반의 생활태도에 대한 규범은 이러한 형식주의에 대한 단적인 예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 18세기의 소설인 박지원의 양반전에 나타나 있는 선비의 체통을 지키기 위한 내용을 살펴보면 “....쌀값을 묻지 말고, 더워도 버선을 벗지 말고, 밥을 먹을 때 맨상투로 밥상에 앉지 말고....막걸리를 들이켠 다음 수염을 쭈욱 빨지 말고, 담배를 피울 때 볼에 우물이 파이게 하지 말고....추워도 화로에 불을 쬐지 말고, 말할 때 이 사이로 침을 흘리지 말고...”등등 모든 품행에 있어서의 형식과 외면적 체통을 중시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외면적 체통에 대한 위반은 자기 자신만이 아닌 자신의 가문과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에 수치심과 손상을 주는 것으로 생각되었기에 비록 형식과 가식이라 할지라도 사회 속에서 용인되는 명분과 규범을 생명처럼 지켜야만 했다.

조선시대의 유교적 가치관은 집단주의 문화적 특성만이 아니라 불확실성에 대한 강한 회피성향을 드러내고 있다. 즉 한국인의 문화적 정서 속에는 자신의 집단과 조금이라도 다른 것은 위험시하는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엄격한 윤리와 구별, 서열 등을 정해놓고 관계적 틀을 형성하며 각각의 신분에 맞는 행동양식과 규범을 설정하고 있다. 개인의 형편에 따른 융통성은 최소화되며 이러한 틀에서 벗어나기란 매우 어렵다.

유교에 있어서 예(禮)는 “도(道)의 말(末)”이라 하여 인간의 정신적 가치가 열매처럼 표면으로 드러나는 것이지만 문제는 “말단(末端)의 폐해(弊害)”라는 용어에서 보듯 인간의 진정한 정신적 가치와 삶이 결여된 형식적인 의례는 “자기과시적 환상”과 “허세”로 발전하기 쉽다. 하지만 체면이 무조건적으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사회 속에서 역할에 맞는 적절한 행동규범과 인간관계에서 적절한 예(禮)를 갖추는 것은 매우 아름답고 성숙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우리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말단(末端)의 폐해(弊害)”를 줄이면서 우리문화의 진정한 가치를 사회와 인간관계 속에서 실현해 나가는 성숙한 모습이 필요하다.  

출처 " 아버지 " 2002년 9월 = 두란노 아버지학교 운동본부